본문 바로가기

스타일,코디 Tip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ant) 1편 _ 꾸뛰르 황제의 유년기



디자이너 스토리의 처음을 장식할 디자이너는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스트이자 평등주의자, 이브 생 로랑이다.


국내에서 편의상 "입생로랑"이라고들 많이 하지만 패션에 최소한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정확한 본명이 이브 생 로랑이라는 것은 알아두도록 하자. 


화장품으로 많이들 알고 있고, 특히나 따뚜아쥬 타투틴트로 그의 이름을 접해본 이들이 많겠지만

꾸뛰르의 황태자라는 이름과 함께 시대를 이끈 혁명가이자, 

흑인을 최초로 런웨이에 세운 평등주의자며, 

여성 정장 바지를 최초로 컬렉션에 올림으로써 여성의 신체에 자유를 부여한 페미니스트다.



원래 이 글의 본제는 이브 생 로랑, 진정한 의미의 페미니스트이자 평등주의자. 라고 지으려 했으나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그의 일생을 한 편의 글로 담기에는 너무 짧다 느껴써

내 생각을 써내리는 건 따로 잡아놓고, 몇 부작으로 이어가 볼 예정이다.




1936년 알제리의 지중해 마을에서 태어난 이브 생 로랑은  

다른 또래 남자아이들과 다르게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체격도 왜소하고 성격도 조용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사랑과 격려가 있었기에 크게 엇나가지 않았고,

십대 초반에 가족과 함께 몰리에르의 연극을 보러 간 이후 연극에서 영감을 받아

배우들의 의상과 무대를 미니어처로 재현해내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다.

이후 여동생들의 인형 옷을 만들어 주거나, 의상 디자인을 취미로 삼으며 그의 재능은 길을 잡아갔다.



1953년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패션계로 진출할 절호의 기회인 

국제 양모 사무국 디자인 컨테스트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다.

그의 인생의 방향타를 잡아준 저명한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이 심사를 하고 있는 컨테스트였다.

정규 교육을 받지도 않은 이브 생 로랑은 드레스 부문에서 3등을 차지하며, 이듬해에는 1등을 차지하며

패션업계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1953년 국제 양모 사무국 컨테스트에서 3등을 거머쥔 Yves Saint Laurant




“I have never in my life met anyone more gifted,” 

브루노프가 이브 생로랑의 스케치를 본 후에 편집장 후임자 에드먼드 찰스에게 남긴 말이다. 


이브 생 로랑을 눈여겨 보던 <Vogue>의 편집장 미셸 드 브루노프는

생 로랑의 스케치가, 디올이 자신에게만 보여준 스케치와 꼭 닮아 있다는 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정보가 굉장히 폐쇄적이고, 디자이너 간의 카피를 막기 위해서

자신의 스케치를 절대 공개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디올의 스케치를 절대로 볼 일이 없었던 이브 생 로랑이 그린 스케치에서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브루노프는

디올에게 소개하였고, 디올 역시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크리스챤 디올의 쿠튀르 하우스 어시스턴트가 된 것이다.







Christian dior과 Yves Saint Laurant







Yves Saint Laurant의 스케치






이제 막 어시스턴트로 커리어를 시작한 생 로랑이었지만, 

디올의 쿠튀르 하우스에서 발표한 80벌의 의상 중 생로랑의 작품에 이를 정도로 크리스챤 디올은 그의 재능을 인정하였다.

자연스레, 크리스챤 디올도 생 로랑을 굉장히 아꼈고

생 로랑도 정규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자신에게 

큰 기회를 부여해주고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 크리스챤 디올에 사제로서 큰 애정을 가졌다.

또한, 디올 쿠튀르에 있는 동안, 이후 자신의 쿠튀르 첫 컬렉션에서 모델로 활약할 빅투와르(Victoire Doutreleau)와도 만나게 된다.




생 로랑이 그의 스승 크리스챤 디올을 회상하며 남긴 말이다.


I would come in every morning and spend the day next to Christian Dior without talking much. I have to say I learned a lot. Dior stimulated my imagination, and he fully trusted me with the work. One of his ideas could prompt mine, and one of my ideas could prompt his. That became more clear in the end than in the beginning. There was no discussion between us. I had an idea. I drew it. I showed him the sketch. The proof was in the whole demonstration. Since I’m not very talkative, I preferred that. It was a tour de force.


(매일 아침 디올 선생님 옆자리로 출근하여 선생님과 하루를 함께한다. 하지만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않는다. 

디올 선생님은 내 상상력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작업을 할 때는 나에게 전적인 신뢰를 주신다. 

선생님의 아이디어 중 일부는 나의 것이기도, 또 나의 아이디어는 선생님의 것이기도 하다.

작업에 돌입할 때 보다 작업이 마무리 될 즈음에 정신적인 교감은 더더욱 분명해진다. 

선생님과 작업에 대한 토론을 나누지는 않는다. 나는 아이디어를 갖고. 스케치로 표현해내며, 디올 선생님께 보여드릴 뿐이다. 

나 역시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기에, 선생님과의 작업 방식이 더욱 좋다. 역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선생님과 함께할 뿐이다.)






하지만 크리스챤 디올은 1957년 휴양지에서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52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진다.

이 때, 스승으로 모시던 크리스챤 디올에 대한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생로랑은 21세의 젊은 나이로 크리스챤 디올 쿠튀르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 제의를 받게 된다.






Christian Dior의 장례식, 그리고 Yves Saint Laurant





세상을 떠난 스승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스승이 하늘에서 내려준 은혜였을까.

생 로랑의 천재성은 수석 디자이너의 자리에 앉으며 빛을 발한다. 

첫번째 컬렉션을 트라페즈 라인으로 대성공을 거두며, 크리스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생 로랑이 파리 최대의 쿠튀르 하우스 크리스챤 디올에 디자이너로서 자리를 잡는 동안 

그의 모국 알제리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