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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코디 Tip

이브 생 로랑 2편, 커리어의 시작과 로맨스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ant) 1편 _ 꾸뛰르 황제의 유년기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이후, 생 로랑은 첫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첫 컬렉션의 준비기간은 10월에 치러진 디올의 장례식 직후부터 

1958년 S/S시즌 컬렉션이 진행되는 1월 30일 까지 고작 3개월에 불과했다.

이 짧은 기간 중 15일 만에 디자인 드로잉을 600장이나 그리기도 했으니

첫 컬렉션에 대한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연인 피에르 베르제와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크리스찬 디올의 장례식에서도 이브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함께 자리에 있었지만, 

생 로랑의 첫 컬렉션까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피에르 베르제는 그의 동료인 화가 베르나드 붸페와 함께 참석한다.

공식적으로 자리를 함께하는 것은 며칠 후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 마리 루이제 부스케가 주선한 자리에서의 일이다.





세계 각지의 언론과 유명 인사들이 참석한 이브 생 로랑의 첫 컬렉션은

시작 후 1시간만에 기립박수와 함께 끝을 맺는다.

쿠튀르의 황태자라는 별칭은 이 컬렉션을 본 뒤에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것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트라페즈 라인"이다.




  

 

 

1958.01.03 Trapeze Line




트라페즈는 사다리꼴이란 뜻으로, 

어깨 실루엣은 핏하지만, 밑으로 내려올수록 플레어가 돋보이는 모양을 본 떠 만든 이름이다.

지금으로 치면 A자 실루엣과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첫 컬렉션 부터 1960년까지 디올에서 6번의 컬렉션을 진행하면서

1950년대에 패러다임이었던 부르주아적 엘레강스로부터 벗어나

조금 더 실용적이며, 진정한 시대의 여성을 위한 의상을 꿈꾸며 디자인하기 시작한다. 





   

1960년 프랑스 뉴스 보도 자료




1960년 A/W시즌에 거리 젊은이들의 스타일, 비트룩을 컬렉션에서 선보인다.

비트룩은 거리위의 패션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아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그의 주 고객층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커리어 중 처음으로 혹평이 가득찬 컬렉션이었다.

하지만 생 로랑은 후에 이 때의 컬렉션을 준비하고 선보이는 과정이 자신의 커리어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시기라고 밝혔다.




이브 생 로랑의 비트룩








한편, 그의 조국 알제리에서는 독립전쟁이 발발한다.

1954년 발발한 무장봉기가 4년 여에 걸쳐 병력이 13만으로 불어나기에 이른 것이다.



디올의 소유주 마르셀 부삭은 고객층의 요구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생 로랑을 내보내기 위해 알제리 군으로 입대시켜버린다.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이후 2~3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알제리의 전쟁에

파리의 패션 디자이너가 알제리의 군대에 입대하게 된 것이다. 기구한 인생이다.





하지만 입대한지 3주 만에 거친 남자들 집단에서의 부적응과 선임병들의 괴롭힘으로 인해

극도의 신경 쇠약과 건강 이상으로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된다.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치러야하는 마당에 후임병으로 온 병사가 파리의 디자이너였으니

괴롭힘이 더욱 심했을 수도 있었다 생각해본다.








군은 생 로랑을 디올 하우스가 아닌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린다.

정신병원에서 생 로랑은 전기 치료와 약물치료로 고통을 받고 

이 때문에 이브 생 로랑은 퇴원 후에도 약물중독으로 오랜 시간을 고생한다.



이브 생 로랑이 정신병원을 전전하고 있는 사이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는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마크 보한에게 넘겨 버린다.





이 시절 전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그의 연인이자 사업 파트너인 피에르 베르제다. 

베르제는 그가 정신병원에 있는 동안 수시로 찾아가 정신적인 보탬이 되어주고,

퇴원 후, 디자인 외에는 문외한이었던 생 로랑을 대신하여 디올 하우스로부터 보상금 68만 프랑과 개인 사무실을 얻어낸다.

생 로랑은 자신의 이름을 건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1961년 9월, 프랑스 파리에 소재한 스폰티니가에 Yves Saint Laurant을 내건 고급 쿠튀르 하우스를 열게 된다.

천재적인 디자이너였지만, 전구를 가는 법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했던 생 로랑에게

피에르 베르제는 그의 평생의 친구이자 조력자였다. 연인 그 이상이었다.

비즈니스와 관련된 모든 부분에서 생 로랑은 전적으로 피에르 베르제의 도움을 받는다.

생 로랑은 디자이너에만 전념할 수 있었고, 그의 연인 피에르 베르제는 이브 생 로랑 하우스가 사업적으로 큰 회사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





1962년 1월 19일 크리스찬 디올로부터 독립한 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은 쿠튀르 하우스에서 첫 컬렉션을 발표한다.